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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투데이

[제주] <제주 4.3 기획> 불명확한 가해의 기록

(앵커)
76년전 제주 4.3 당시 
경찰과 군대에 의해
많은 민간인들이 희생됐습니다. 

당시 잔인하기로 유명했던 
서북청년단부터 군경까지,
이들은 어떤 만행을 저질렀고 어떻게
기록되고 있는지 정리해봤습니다.

제주문화방송 김항섭 기자입니다. 

(기자)
지난해 4.3추념식 행사장.

서북청년단을 계승한다고 주장하는
극우단체 회원들이 차량에서 내리려고 하자
유족들이 막아섭니다.

* 4.3 유족 
"너희들이 어디라고 여길 와"

결국 이들은 유족들의 반발로 
한 시간 만에 철수했습니다. 

서북청년단, 일명 서청이라 불리는 단체는
4.3 당시 제주도민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는데요.
이들은 과연 어떤 존재였을까요.

 4.3 당시 서청 출신 경찰들은
무고한 민간인들을 잔혹하게 학살했습니다. 

서청 출신 경찰이 근무했던 조천지서에서는 
인근 주민 가운데 가족이 한 명이라도 없는 이들을
도피자 가족으로 간주해 
126명을 집단 총살했습니다.

* 고흥년 / 조천지서 앞 밭 사건 목격자
“산에 올라간 아들, 다른데 올라간 아들 어머니들을
폭도 가족으로 잡아서 (밭에) 세워서 순경들이 왔어요.
그 사람들이 총으로 쏴 버리고..."

서북청년단은 4.3 당시 지금의 경찰청장 격인 
조병옥의 요청에 의해 진압요원으로 
제주에 급파된 것으로 기록되어있습니다.

당시 정부는 지원자를 늘리기 위해 
단원 20명을 모아오면 그 가운데 일부를
경찰로 특채하기도 했습니다.

* 이동현 / 4.3연구소 연구원
"정부가 수립이 되고 정상적으로 공식적인
자신들의 토벌작전에 투입을 시켜야 하니까
군경이라고 하는 신분을 어떻게 보면
편법적인 방법으로 정치적인 목적으로 신분을 준 거예요."

4.3 당시 민간인 학살에 앞장선 경찰.
이와 함께 제주에 파견된 군대 역시
민간인 학살에 주요한 역할을 했는데요.
이들의 행적을 다시 따라가 보겠습니다.

1948년 5월 제주에 부임한 
박진경 대령의 11연대.

부임 열흘 만에 주민 6천여 명을 
체포하며 강경 진압에 나섰습니다. 

이후 1948년 11월 
송요찬 육군 계엄사령관이 
초토화작전을 펼치면서
참혹한 피해가 이어졌습니다.

1949년 1월에는 
함병선 제2연대장의 토벌작전의 일환으로 
4.3의 가장 큰 비극 가운데 하나인
북촌마을 주민 350여 명이
총살당하기로 했습니다. 

* 양정심 / 4.3 평화재단 조사실장 
"군의 진압작전의 상당수가 작전이라는
이런 의도하에 많은 민간인들이 희생됐다는 거죠.
민간인들이 토벌의 대상이 되고 그 집들 어떻게 보면
생존 거주지인 집들이 불타고 마을이 불타고..."

4.3 민간인 학살의 주범이었던 
군경은 2006년 법제처의 해석에 따르면 
희생자의 범위에 포함됩니다. 

제주로 파견돼 민간인 학살에 앞장섰던 
우익단체원과 군인, 경찰이 국가유공자로 
인정돼 보훈의 대상이 된 겁니다. 

특히 학살을 주도했던 군 수뇌부를
추도하고 공적을 기리는 비석이
아직까지 도내 곳곳에 남아있습니다.

어승생 한울누리공원 인근에 
박진경 대령을 추모하는 비석이 설치돼 있고,
제주 특전사훈련장 입구에는 
함병선 제2연대장의 공적기념비까지
세워져 있습니다. 

이들은 제주를 떠난 후에도 
대한민국 정부와 군에서 요직을 맡은 뒤 
국립묘지에 묻혔습니다. 

4.3 당시 잔혹한 학살을 
주도했던 가해자가 희생자로, 
국가유공자로 인정되는 현실에
유족들의 고통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으로 
남아있습니다.

MBC뉴스 김항섭입니다. 

김항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