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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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7월 19일 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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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7월 20일 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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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포트) U대회*F1 예산낭비 심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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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C▶
광주시와 전라남도가 유치한
대형 국제스 포츠 행사에 예산이 허투루 쓰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자치단체들 주장대로 국제적 위상은 높아질 지 모르겠지만 그 돈 다 시도민들이 낸 혈세입니다.

윤근수 기자입니다.

◀END▶

2015년 하계 유니버시아드대회를 유치하면서
광주시는 참가 선수단의
항공료와 체재비를 지원하겠다는
파격적인 공약을 내세웠습니다.

(CG) 항공료는 선진국 선수단의 경우 60%
개발도상국은 80%를 대신 내주고,
체재비는
하루에 50유로씩 지급하기로 했습니다.

이 금액을 모두 합치면
151억 9천만원이 들 것으로 추산됐습니다.///

국회 예산정책처는 과도한 유치 공약으로
대회 준비 비용이 늘어나
결국 예산이 낭비됐다고 지적했습니다.

F1 대회는 예산 낭비가 더욱 심각했습니다.

철저한 사전 검증 없이
불리한 조건으로 유치 계약을 체결해
매년 평균 577억원의 적자를 내고 있고,
계약대로 7년동안 대회를 치르면
누적 적자가
4천억원이 넘을 것으로 예상됐습니다.

대회는 독자적으로 유치해놓고
스스로 뒷감당을 못해
국비 천억원이 지원됐다고도 꼬집었습니다.

국회 예산정책처는 충분한 검증 없이
자치단체들이 경쟁적으로
국제 스포츠대회를 유치하면서
예산이 낭비되고 있다며
유치 타당성을 사전에 분석하는
합리적인 기준이 필요하다고 지적했습니다.

엠비씨 뉴스 윤근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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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포트) 초라한 "바다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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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어제 바다의 날을 맞아
지역에서는 다양한 행사가 열렸습니다.

전라남도는 바다 사막화 현상이나
자연 재해 등 직면한 해양, 수산 문제점들을
지혜롭게 풀어나갈 뜻을 밝혔습니다.

나현호 기자입니다.

◀VCR▶

◀SYN▶
"하나, 둘, 셋"

파란 통에 담긴 치어 2천여 마리가
바다로 방류됩니다.

올 해로 18번째를 맞은 '바다의 날'을 맞아
지역에서는 바다를 주제로 한 행사가
다채롭게 열렸습니다.

깨끗한 바다를 만들기 위해
여수와 순천 일대의 해안과 수중에서는
바다정화 운동이 펼쳐졌습니다.

또, 어린이 바다 그림그리기 대회 등,
학생들을 위한 해양환경 프로그램도
마련됐습니다.

◀INT▶박하은
"와서 많이 배운다..물고기 풀어준 것 인상적"

갯녹음 현상으로 인한 사막화,
포화상태에 다다른 가두리 양식장 등,
직접적인 해양, 수산 문제에 직면한 전라남도.

특히 지난 해 세차례나 몰아친 태풍과
적조 등의 자연 재해로 인해
전남동부지역 양식업계가 큰 타격을 입어
대책 마련도 절실한 실정입니다.

◀INT▶정병재
"태풍 대비해 내파성 가두리 개발 중"

그러나,
전체적으로 전남동부지역의 바다의 날은
예전에 비해 초라했습니다.

'살아있는 바다, 숨쉬는 연안'이라는 주제로
세계박람회를 개최하며 성대하게 열렸던
지난 해.

해양 환경 보호의 의지를 담은
'여수선언'까지 발표된 지역임에도
올 해 바다의 날 행사는
너무나 조촐하게 치뤄져 아쉬움을 남겼습니다.

MBC뉴스 나현호입니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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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년 전 오늘 리포트12 - "산 자의 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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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광주MBC 5.18 연속 기획보도, '33년 전 오늘' 마지막 순서입니다.

오늘은 살아남은 이들이 이야기하는 5.18을 들어보겠습니다.

(기자)

김태종/당시 시민궐기대회 사회자
"(그 때) 할머니들이 했던 말이 '아이고 아까운 내 아들들 다 죽네'"

안성례/당시 기독병원 간호감독
"가족들이 어찌 알고 와가지고는 '아직도 (몸이) 이렇게 따뜻하다고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영안실로 보내느냐'하면서 우니까 우리도 같이 (울면서)... '이미 어떻게 할 길이 없다'"

송선태/5.18 기념재단 상임이사
"(전두환 신군부 가운데) 단 한명도 저희들이 했습니다. 오판했습니다. 라고 시인하거나 사과를 한 적이 없습니다."

강용주/당시 고교생(광주 트라우마센터장)
"총을 버리고 도망쳤던 비겁한 내 자신, 살아남은 자의 부끄러움이 투영되는 (5.18입니다.)"

최병귀/계엄군 구타 피해자
"잠을 못 자니까 (당시 일이) 머리에 떠올라가지고 잠이 안 와요. 잠이."

김성용 신부/당시 수습대책위원
"살면서 다시 그런 기회가 주어지면 똑같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김공휴/당시 시민군
"(시민들이) 다 음식 준비해가지고 시위 차량에다가 실어줬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러한 것들이 힘이 나고 '아, 이것을 내가 잘하고 있는 것이구나.'"

인요한/당시 항쟁지도부 통역(연세의료원 국제진료소장)
"(5.18은 대한민국이) 균형있는 민주발전의 토대고 역사의 현장이다. 우리가 잊지를 않고 대대로 광주의 의미를 가르쳐야 한다."

이강갑/당시 시민군
"좋은, 큰 민주화를 위해서 헌신했다 내 몸 망가졌다 하더라도 나 그렇게 자부하고 삽니다."

정상용/당시 항쟁지도부
"우리 국민 모두가 그런 높은 정의감과 민주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게 세계사적으로 가장 자랑스러운 면이 아닌가."

구희현/당시 시민군
"산 자들은 많이 할 말이 없습니다. 오직 행동해야 할 따름이죠."

(끝)


영상취재*편집 강성우

음악: 서영은 '임을 위한 행진곡'

◀ANC▶
◀END▶
◀VC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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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포트12) 33년 전 오늘 "산 자의 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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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광주MBC 5.18 연속 기획보도, '33년 전 오늘' 마지막 순서입니다.

오늘은 살아남은 이들이 이야기하는 5.18을 들어보겠습니다.

(기자)

김태종/당시 시민궐기대회 사회자
"(그 때) 할머니들이 했던 말이 '아이고 아까운 내 아들들 다 죽네'"

안성례/당시 기독병원 간호감독
"가족들이 어찌 알고 와가지고는 '아직도 (몸이) 이렇게 따뜻하다고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영안실로 보내느냐'하면서 우니까 우리도 같이 (울면서)... '이미 어떻게 할 길이 없다'"

송선태/5.18 기념재단 상임이사
"(전두환 신군부 가운데) 단 한명도 저희들이 했습니다. 오판했습니다. 라고 시인하거나 사과를 한 적이 없습니다."

강용주/당시 고교생(광주 트라우마센터장)
"총을 버리고 도망쳤던 비겁한 내 자신, 살아남은 자의 부끄러움이 투영되는 (5.18입니다.)"

최병귀/계엄군 구타 피해자
"잠을 못 자니까 (당시 일이) 머리에 떠올라가지고 잠이 안 와요. 잠이."

김성용 신부/당시 수습대책위원
"살면서 다시 그런 기회가 주어지면 똑같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김공휴/당시 시민군
"(시민들이) 다 음식 준비해가지고 시위 차량에다가 실어줬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러한 것들이 힘이 나고 '아, 이것을 내가 잘하고 있는 것이구나.'"

인요한/당시 항쟁지도부 통역(연세의료원 국제진료소장)
"(5.18은 대한민국이) 균형있는 민주발전의 토대고 역사의 현장이다. 우리가 잊지를 않고 대대로 광주의 의미를 가르쳐야 한다."

이강갑/당시 시민군
"좋은, 큰 민주화를 위해서 헌신했다 내 몸 망가졌다 하더라도 나 그렇게 자부하고 삽니다."

정상용/당시 항쟁지도부
"우리 국민 모두가 그런 높은 정의감과 민주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게 세계사적으로 가장 자랑스러운 면이 아닌가."

구희현/당시 시민군
"산 자들은 많이 할 말이 없습니다. 오직 행동해야 할 따름이죠."

(끝)


영상취재*편집 강성우

음악: 서영은 '임을 위한 행진곡'

◀ANC▶
◀END▶
◀VC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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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년 전 오늘 리포트11 - "죽음으로 광주를 지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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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33년 전 오늘은 계엄군에 의해 도청에 있던 시민군이 진압된 날입니다.

처참한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광주시민들의 희생은 33년을 거치면서 한국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부활했습니다.

김철원 앵커입니다.

(기자)

새벽 3시.

도청 스피커에서 흘러 나오는 여성의 애절한 목소리가 광주 시내를 울리고 있습니다.(1980.5.27.화요일 맑음. 아침최저 8도, 낮최고 22도)

(인터뷰)박영순/27일 새벽 마지막 방송 담당
"광주시민 여러분, 계엄군들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학생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최후까지 도청에 남은 2백명의 시민군들은 저마다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습니다.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은 외무담당 부위원장 정상용과 마지막 얘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죽음이 코 앞에 다가와 있었지만 대화 내용은 담담했습니다.

(인터뷰)정상용 당시 항쟁지도부 부위원장
"상원아 후회 없냐? 죽어도 후회 없냐?"

"형님, 형님 후회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죽는 것은 역사 속에서 영광스럽습니다." (이런 얘기를 마지막으로 나눴습니다.)

(녹취)계엄군이 총 쏘는 소리/
"탕 탕 탕"

이른바 '폭도소탕작전'은 30분도 안돼 끝났습니다.

도청 안에서 14명, YMCA 등 도청 인근에서 12명 등 26명이 계엄군의 총탄에 이슬처럼 스러져 갔습니다.

2백명도 안되는 시민군이 100배나 많은 2만명의 정규군에 맞선다는 건 애초에 말이 안되는 싸움이었습니다.

계엄군은 승전가를 불렀습니다.

(녹취)군가
"되게 하라. 특전부대 용사들."

광주를 진압한 전두환 중앙정보부장은 그 해 9월 대통령에 취임합니다.

79년 12.12부터 10개월에 걸친 쿠데타의 완성이었습니다.

(녹취)
"제 11대 대통령으로..."

광주를 진압한 이들이 정권을 차지하고 대통령이 되고 훈장을 챙기면서 광주는 잊혀지는 것처럼 보였고 이젠 다 끝난 것처럼 생각됐습니다.

하지만 국민들은 전두환 집권 내내 민주화를 요구했고 그리고 마침내 87년 6월 항쟁 때 민심이 폭발했습니다.

(인터뷰)유시민/'기억하는 자의 광주' 대표 저자
"1980년 5.18 이후에 1987년 6월 항쟁 때까지 7년간 당시 민주화운동을 했던 거의 모든 사람들의 머릿속을 지배했던 생각이 광주의 전국화, 5.18의 전국화, 10개 20개의 광주는 진압 못한다. 저 쪽에서..."

민주화 이후 5.18은 극적인 반전을 맞습니다.

폭도들은 유공자가 됐고 폭동은 한국민주주의의 상징적 사건이 되면서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 다 끝난 게 아니었습니다.

5.18을 왜곡하고 폄훼하는 세력들이 기지개를 켜면서 틈을 노리고 있습니다.

(인터뷰)정수만/5.18유족회 전 회장
"다들 이제 뭐 다 밝혀졌지 않았냐라고 이야기하는데 정작 중요한 것들은 하나도 밝혀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 진실은 꼭 밝혀져야 된다그러는데 체적 오월의 진실은 하나도 밝혀지지 않았어요."

33년 전 오늘, 이 곳을 지키던 시민군은 예정된 죽음을 각오했습니다.

그들의 희생은 이후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꺼지지 않는 등대로 자리잡았습니다.

하지만 죽음으로 광주를 지켜낸 이들이 오늘날 한국의 현실을 보고 뭐라고 생각할 지가 궁금해지는 요즘입니다.

MBC뉴스 김철원입니다.

영상취재*편집 강성우
c.g. 오청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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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포트11) 33년 전 오늘 "죽음으로 광주를 지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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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33년 전 오늘은 계엄군에 의해 도청에 있던 시민군이 진압된 날입니다.

처참한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광주시민들의 희생은 33년을 거치면서 한국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부활했습니다.

김철원 앵커입니다.

(기자)

새벽 3시.

도청 스피커에서 흘러 나오는 여성의 애절한 목소리가 광주 시내를 울리고 있습니다.(1980.5.27.화요일 맑음. 아침최저 8도, 낮최고 22도)

(인터뷰)박영순/27일 새벽 마지막 방송 담당
"광주시민 여러분, 계엄군들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학생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최후까지 도청에 남은 2백명의 시민군들은 저마다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습니다.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은 외무담당 부위원장 정상용과 마지막 얘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죽음이 코 앞에 다가와 있었지만 대화 내용은 담담했습니다.

(인터뷰)정상용 당시 항쟁지도부 부위원장
"상원아 후회 없냐? 죽어도 후회 없냐?"

"형님, 형님 후회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죽는 것은 역사 속에서 영광스럽습니다." (이런 얘기를 마지막으로 나눴습니다.)

(녹취)계엄군이 총 쏘는 소리/
"탕 탕 탕"

이른바 '폭도소탕작전'은 30분도 안돼 끝났습니다.

도청 안에서 14명, YMCA 등 도청 인근에서 12명 등 26명이 계엄군의 총탄에 이슬처럼 스러져 갔습니다.

2백명도 안되는 시민군이 100배나 많은 2만명의 정규군에 맞선다는 건 애초에 말이 안되는 싸움이었습니다.

계엄군은 승전가를 불렀습니다.

(녹취)군가
"되게 하라. 특전부대 용사들."

광주를 진압한 전두환 중앙정보부장은 그 해 9월 대통령에 취임합니다.

79년 12.12부터 10개월에 걸친 쿠데타의 완성이었습니다.

(녹취)
"제 11대 대통령으로..."

광주를 진압한 이들이 정권을 차지하고 대통령이 되고 훈장을 챙기면서 광주는 잊혀지는 것처럼 보였고 이젠 다 끝난 것처럼 생각됐습니다.

하지만 국민들은 전두환 집권 내내 민주화를 요구했고 그리고 마침내 87년 6월 항쟁 때 민심이 폭발했습니다.

(인터뷰)유시민/'기억하는 자의 광주' 대표 저자
"1980년 5.18 이후에 1987년 6월 항쟁 때까지 7년간 당시 민주화운동을 했던 거의 모든 사람들의 머릿속을 지배했던 생각이 광주의 전국화, 5.18의 전국화, 10개 20개의 광주는 진압 못한다. 저 쪽에서..."

민주화 이후 5.18은 극적인 반전을 맞습니다.

폭도들은 유공자가 됐고 폭동은 한국민주주의의 상징적 사건이 되면서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 다 끝난 게 아니었습니다.

5.18을 왜곡하고 폄훼하는 세력들이 기지개를 켜면서 틈을 노리고 있습니다.

(인터뷰)정수만/5.18유족회 전 회장
"다들 이제 뭐 다 밝혀졌지 않았냐라고 이야기하는데 정작 중요한 것들은 하나도 밝혀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 진실은 꼭 밝혀져야 된다그러는데 체적 오월의 진실은 하나도 밝혀지지 않았어요."

33년 전 오늘, 이 곳을 지키던 시민군은 예정된 죽음을 각오했습니다.

그들의 희생은 이후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꺼지지 않는 등대로 자리잡았습니다.

하지만 죽음으로 광주를 지켜낸 이들이 오늘날 한국의 현실을 보고 뭐라고 생각할 지가 궁금해지는 요즘입니다.

MBC뉴스 김철원입니다.

영상취재*편집 강성우
c.g. 오청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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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년 전 오늘 리포트10 - "죽음을 앞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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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계엄군의 진압이 임박해있던 33년 전 오늘 이 시각, 도청엔 죽음을 뛰어넘은 숙연함과 광주를 지키겠다는 결기가 가득했습니다.

젊은이들의 아까운 목숨 살려보겠다고 광주의 어른들이 탱크 앞에 맞섰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김철원 기자입니다.

(기자)

시민들은 매일 궐기대회를 열어 광주를 지키겠다는 의지를 다졌지만 불안감은 갈수록 커졌습니다.

계엄군이 도청에 재진입하는 건 시간문제라는 소문이 돌았고 도청 앞 광장의 술렁임도 커져만 갔습니다.

도청에서 계엄군을 몰아낸 지 엿새째인 새벽 5시.(1980.5.26.월요일, 맑음. 낮최고기온 19.1도)

화정동에 계엄군의 탱크가 나타났다는 제보가 접수돼 도청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드디어 진압이 시작된 것일까.

불안해하는 시민들과 맞서 싸우겠다는 항쟁지도부를 진정시키며 홍남순 변호사 등 광주의 어른들이 일어섰습니다.

탱크 앞에 드러누워서라도 진압을 막겠다며 이른바 '죽음의 행진'을 시작했습니다.

(인터뷰)김성용 신부/'죽음의 행진' 대변인(화면 속 당사자)
"어른들이 총 맞으러 갈테니까 그 놈들이 쏘면 할 수 없지. 죽지 먼저. 우리가 먼저 죽을거야. 너희들은 여기서 끝까지 사수해라. 만약에 우리를 죽이고 여기에 오면 너희들도 마지막 한 사람까지 싸워라. 광주의 자존심을 지키고 싸워라."

계엄군은 일단 탱크의 머리를 돌려 돌아갔지만시민들 사이의 동요는 더 커졌습니다.

항쟁지도부는 마지막 순간이 임박했음을 직감하고 처음이자 마지막 외신 기자 브리핑을 진행했습니다.

외신으로나마 기록을 남겨야 했습니다

윤상원 대변인이 기자회견에 나섰습니다.

(인터뷰)인요한/연세의료원 국제진료소장(당시 윤상원 대변인 통역)
"북을 향하고 있는 총이 왜 남을 향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상황이 어렵다. 식량이 떨어져가고 있고 물도 바닥나고 있고 우리는 빨갱이가 아니다. 우리 매일 반공 구호를 외치고 시작한다. 그렇게 몰고 가지 마라. 억울하다"

오후 들어 도청 앞 광장 상공에서는 헬기가 소탕작전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전단을 뿌렸습니다.

(녹취)계엄군 선무방송/
"시민은 문을 열지 마십시오. 시민은 폭도를 숨겨주지 마십시오. 시민은 군 작전에 협조해 주십시오."

항쟁 지도부는 학생과 여성, 노약자들을 도청 밖으로 보냈습니다.

하지만 집에 갔다 다시 도청으로 돌아오는 젊은이들이 있었습니다.

(인터뷰)구선악/故 이정연씨(5.27 진압작전 때 사망) 어머니
"엄마 아버지 앉아보세요. 내가 할 말 있대요. 무슨 할 말이 있냐. 지금 나가면 안된다. 지금 나가면 죽는다. (그랬더니 아들이) 그 잡초를 누가 뽑을 것이요. 그러면서 우리가 피를 하나라도 흘림으로써 그 잡초를 뽑을 것이요. 그리고 콜라 한 병 마시고 그리고 나간 뒤로..."

윤상원 대변인은 글라이스틴 주한미대사에게 전화를 걸어 중재를 요청했지만 글라이스틴 대사는 중재 요청을 거부했습니다.

계엄군은 자정을 기해 시내전화를 모두 끊었습니다.

시민군은 최후의 항전을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둠이 짙어질수록 도청 안에 남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습니다.

부모 형제의 울부짖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들은 발길을 되돌리지 않았습니다.

MBC뉴스 김철원입니다.


영상취재*편집 강성우
C.G. 오청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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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년 전 오늘 리포트9 - "미국을 믿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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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5.18 33주년 기획보도, 오늘은 미국이 80년 5월, 광주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짚어보겠습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시민들은 미국이 광주의 구원자일 것이라 믿었지만 나중에 드러난 사실은 철저한 외면이었습니다.

김철원 기자가 보도합니다.

(기자)

33년 전 오늘, 1980년 5월 25일에 작성된 한 광주시민의 육필 성명서입니다.(1980.5.25.일요일 비. (26.1mm) 낮최고기온 23.3도)

미국 7함대 항공모함 코럴시호가 이틀 전 부산항에 입항했으니 전두환 신군부가 물러나는 것은 이제 시간 문제라며 용기를 내자는 내용입니다.

계엄군을 몰아내긴 했지만 살육이 언제 다시 재개될 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에서 시민들이 민주주의의 수호자라 여겼던 미국에 거는 기대감은 엄청났습니다.

(인터뷰)문순태/소설가(당시 전남매일 편집부국장)
"미군 군함이 부산으로 오고 있다는 대자보가 나왔어요. 그러니까 '야, 우리를 구출하러 온다' 이래가지고 얼마나 설렜는가 모르겠어요. 그래서 기자들도 굉장히 기대를 하고 그랬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미국은 광주시민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5.18 직전 글라이스틴 미국 대사와 크리스토퍼 미 국무부 차관이 주고 받은 비밀 전문입니다.

미 정부는 전두환 신군부가 시위 진압을 위해 특전사를 동원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고, 심지어 신군부에 지지 의사를 보여야 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인터뷰)글라이스틴 당시 주한미대사(생전 인터뷰)
"제 생각에 그 사건(5.18)에 대한 미국의 책임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한국인에 의해 발생한 사건이고 시위를 하던 학생들도 미국사람이 아닌 한국사람이었고 한국민을 상대로 사용된 군대도 미국인이 아닌 한국인이었습니다."

미국 동의 없이는 투입할 수 없었던 전방부대인 20사단의 작전통제권도 신군부에 넘겨줬습니다.

미국은 신군부가 5월 27일 도청 진압작전을 펼 때도 신군부와 함께 작전 개시 일정을 협의했습니다.

(녹취)1988년 광주청문회/
정창화 민정당 의원:"미국하고 뭘 협의했다는 말입니까?"

이희성 당시 계엄사령관/
"광주진압작전이 장시일에 걸쳐 해결을 못한다든가 그 때 김일성의 오판이라도 있을까 해서 여기에 대한 대비 대책이 필요했는데 (그래서 미국과 진압 일정을 협의했습니다.)

민주주의의 수호자 미국에 대한 믿음은 5.18을 거치면서 불신으로 바뀌게 됩니다.

도청이 진압된 이후 서울과 광주 부산의 미문화원에는 미국의 책임을 묻는 점거농성과 방화사건, 대학생들의 분신이 줄을 이었습니다. (1980.12 광주 미문화원 방화 1982.3 부산 미문화원 방화 1985.5 서울 미문화원 점거농성 1985.12 광주 미문화원 점거농성 1986.4 서울대생 이재호, 김세진 분신 )

(인터뷰)정재호/조선대 민주화운동연구원 전임연구원
"5.18을 계기로 해서 드러나게 된 거죠. 확인되고. 미국의 양면성, 민주주의를 위해서 뭔가 역할도 하지만 그것은 미국의 국익의 차원, 미국의 전략적 이해관계 차원에서 하는 행동이었다."

광주 학살의 책임을 물어 전두환 신군부에게는 일부 단죄가 이뤄졌습니다.

하지만 학살을 방조하고 전두환 정권을 지지했던 미국은 지금까지도 책임이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80년 5월 광주의 진실을 밝혀내기 위해 반드시 풀고 넘어가야 하는 문제입니다.

MBC뉴스 김철원입니다.

영상취재*편집 강성우
C.G. 오청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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